7•4 사건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서

따사로운 봄 햇살에 청평 성지의 만물은 연녹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새롭게 소생하고 있다. 2008년 4월 20일 일요일 오전 10시 20분, 우리(임현진 교수, 도현섭 박사과정)는 약동하는 봄기운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벼이 통일교 수난의 현장 서대문 형무소를 향해 떠났다. 참부모님께서 하나님 조국광복 최후선언 대회를 개최하시는 등 세계적으로 통일교의 애천, 애인, 애국의 정신이 기치를 날리는 현재의 시점에서 수난이라는 두 글자는 가깝게 느끼기 어려운 개념인 듯했다.

한국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

오전 11시 40분, 우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의주로 247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도착했다. 을사늑약 성립 이후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08년 세워진 서대문형무소(당시 경성감옥)는 내내 악명 높은 일제의 대표적인 민족 탄압기관으로 암약해온 곳이다. 무심결에 마주한 높다란 서대문형무소 정문과 담장은 따사로운 햇살도, 푸르름을 뽐내는 자연경관도 고요하게 만들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전체적으로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고문과 핍박을 당했던 애국선열들을 위무하고 한국의 후속세대에게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과 고통 어린 수난노정을 관람객들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대한민국 당국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셨던 참아버님의 고난을 알 길은 없으나 애국선열들의 고난의 역사를 전하는 산 교육장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전시관에는 영상실, 기획전시실, 자료실로 구성된 1층 ‘추모의 장’과 민족저항실, 형무소역사실, 옥중생활실로 구성된 2층 ‘역사의 장’, 임시구금실과 고문실을 재현한 지하 1층 ‘체험의 장’ 등이 마련돼 있었다. 둘러보는 내내 발걸음 닫는 곳마다 처절한 고문과 핍박의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 했다. 각종 고문방식을 알려주는 역사관의 현실은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현실을 실감하게 했으며,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 참부모님의 축복으로 한국과 일본의 화합과 통일을 추구하는 통일가의 일원들에게 지난날의 양국간 아픈 사연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줬다. 머리가 아파오고 가슴이 저며 왔다. 속이 메스껍고 육신을 주체할 수 없는 장면들이 계속됐다. 임산부, 노약자, 심신허약자는 관람을 금한다는 지침이 심히 공감됐다.

애국선열들에 대한 정보를 전시하고 있는 중앙사와 본래 상태대로 보존돼 있는 12옥사, 순국선열들의 고문, 재판, 수감, 사형 등을 체험하게 돼 있는 공작사까지 둘러보면서 우리는 시종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1923년에 목조건물로 지은 사형장 앞에서는 조국독립의 한을 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선열들의 넋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사형장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시신을 공동묘지로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 놓은 비밀통로도 있었다. 유관순 열사(1904-1920) 등이 수감 됐었던 여성전용 지하감옥은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불리는데, 높이는 1.48m로 허리를 똑바로 펼 수 없는 1평 미만의 독감방들로 구성돼 있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참사랑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재림메시아를 보낸 대한민국이 겪어야 했던 수난 어린 시련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왔다.

서대문형무소 설립의 유래

일본제국은 한국을 강제 점령하고,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저항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강권으로 탄압하며, 이들을 일제 투옥하기 위해 대한제국 시대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인근에 대규모로 1907년 감옥을 지었다. 일본인의 설계로 당시 화폐로 약 5만원을 들여 지은 경성감옥은 145.2㎡ 규모의 감방과 24.2㎡ 정도의 부속 시설로 구성되었으며 수용인원은 500명이었다. 당시 전국 8개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300여 명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대규모 감옥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어제와 오늘

 1908년 10월 21일 : 경성감옥으로 신축
 1912년 9월 3일 : 서대문감옥으로 명칭변경
 1923년 5월 5일 : 서대문형무소로 명칭변경
 1945년 11월 21일 : 서울형무소로 명칭변경
 1961년 12월 23일 : 서울교도소로 명칭변경
 1967년 7월 7일 : 서울구치소로 명칭변경
 1987년 11월 15일 :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
 1998년 11월 5일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

대한민국의 핍박으로 인한 7.4 사건의 전모

민족의 수난 1번지나 다름 없는 서대문형무소는 기독교의 이단정죄와 핍박에 편승한 대한민국 정부의 무고로 참아버님께서 옥고를 치르신 현장이다. 1955년 당시 본부교회였던 장충동 교회 현장에서 참아버님(7월 4일 수감)은 초대 협회장인 고 유효원(7월 13일 수감), 유효민, 유효영(이상 7월 6일 수감), 김원필(7월 5일 수감) 등과 더불어 경찰 당국에 의해 구속 수감되셨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 대학가에 열화처럼 번졌던 통일교의 전도열기에 놀란 기독교계 인물들과 이들의 지지기반이었던 권력층의 대대적인 공작의 결과였다.

참아버님은 처음 치안국 특수정보과(중부서)로 연행되셨다가 7월 13일 서울지검으로 송치된 이후 미결수(수인번호 390번)로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셨다. 해방 이후 당시 서대문형무소는 주로 정치사상범 등을 수용하는 서울형무소라는 공식 명칭을 갖고 있었다.

1955년 4월 무렵부터 이화여자대학교 퇴직, 퇴학사건과 더불어 매스컴의 조직적인 통일교회 비판기사가 실렸다. 흡사 ‘음란하고 패륜적인 사교’가 출현한 것처럼 몰아세우는 분위기였다. ‘통일교회는 전기장치가 있어 자리에 들러붙어 일어설 수가 없으며, 밥에 약을 넣어 세뇌시키고, 지하실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며, 불륜한 관계를 가진다’는 온갖 중상모략과 불온한 유언비어가 횡행했다.

전혀 혐의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경찰과 검찰은 진실을 묵살하면서 참아버님을 비롯한 교회 간부들을 연행한 것이다. 구속 사유는 ‘풍문에 편승한 간통혐의와 불법감금, 병역법 위반’ 등이었다. 그러나 결국 10월 4일 결심공판에서 참아버님은 무죄가 선고돼 석방됐고, 유효원 벌금 5천환, 유효영, 유효민, 김원필은 징역 8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참아버님의 의연한 옥중생활과 통일교인의 극성스런 면회

  
 
 
 
 

참아버님께서는 처음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셨을 때, 형무소장과 구치과장으로부터 천하대악의 주인공으로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조롱과 조소, 욕설 앞에서도 뜻을 위한 길이라고 의연히 대처하시며 묵묵히 기도로 일관하셨다. 간혹 참아버님은 영적 직관력으로 형무관들의 비리사실을 지적하여 문책하셨으며, 수인들 사이에서는 몽시와 같은 영계의 증거로 참아버님을 귀한 분으로 존중하기 시작했다.

대략 2주가 지나지 않아 2시간도 채 주무시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는 참아버님은 교도관과 수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형무소장과 구치과장, 간수들은 참아버님께 용서를 빌고 정중히 모시며 선생님으로 호칭하였다. 수박, 참외, 아이스크림 등 음식을 가져와 대접하는 등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기결수들도 참아버님을 스승처럼 여기며 비밀을 털어놓고 말씀을 들었다.

참아버님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창 밖의 구진봉을 바라보시고, 출옥하시면 이 곳에 수감된 죄수들을 해원하겠다는 다짐을 하셨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를 떠도는 순국선열들의 영혼을 위무하고, 이곳에 인연되었던 사람들의 한까지 위로하려는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훗날 구진봉은 통일교회의 성지로 지정돼 정성의 터전으로 기억돼 오고 있다.

한편 서대문형무소는 하루 한 번 3명의 면회가 가능했는데, 10월 4일 참부모님께서 출감하실 때까지 매일 15명의 면회자가 면회장을 찾았다. 간수들은 만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면회를 오는 통일교인에게 감복했다.

식구들은 면회를 통해 참아버님께 신앙적인 지도를 받았고, 참아버님의 고난에 동참했다. 뿐만 아니라 수감기간 동안 형무소 대문 앞은 물론 법정과 검찰청을 억척스레 지키며 참아버님 일행을 위하여 기도하고 정성 드렸다. 본부교회에서도 매일 자정부터 3시간 간격으로 8회 정성을 드리는 등 교회 전체가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참아버님과 함께 수감됐던 고(故) 유효원 협회장은 옥중에서 자신의 결의를 성서 여백에 ‘고난과 새 생명’이라는 시로 지어 표현하였다. 또 전본부교회에서 청년식구들과 함께 철야정성을 드리며 활동했던 고(故) 황환채씨는 ‘내 가리이다’를 작사하여 참아버님 출감하실 때 직접 노래로 불러드리기도 했다.

당국의 탄압에 의해 순국선열들의 고난의 터에서 참아버님께서 수감되셨던 역사적 사실은 통일교 후속세대에게 영원토록 기억돼야 한다. 지금까지 통일교를 온갖 헛소문의 온상으로 기억되게 하는 상처가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있기 때문이다.

대한의 국민들이 찾아와 순국선열들이 겪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의 현장을 체험하며 가슴 아파하는 등 역사적 교육의 장소가 된 서대문형무소. 그 기억의 한 모퉁이에는 통일교인들의 시련과 고난의 장면들도 겹쳐 있다. 시종 가슴 아픈 순례의 기간이었으며, 참아버님에 대한 기독교계 정부당국의 핍박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당국의 핍박은 깊은 섭리적 인연의 고리를 떠올리게 했다.

한편 서대문형무소를 찾으실 분들은 마음이 굳고 담대하며 건강하신 분들이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곳에서 상처 입은 영혼들의 흔적이 너무나 생생한 아픔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정리- 임현진 청심신학대 교수/ 출처- 청심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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